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적으로 형성하고 유지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민주주의와 인권·법치가 국내외에서 존중받고, 항공과 항행의 자유가 보장되며, 교역이 자유로운 열린 국제질서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질서는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이 질서하에 민주주의와 인권·법치가 세계적으로 확장되어 이제는 인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았다.
자유주의 국제질서하에서 국제사회는 대체로 자유시장 경제의 원칙을 준수하며 교역과 투자를 증진했고,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성장과 빈곤 감소를 이뤄낼 수 있었다. 국제법이 강화되고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가 출범하면서 평화적 분쟁 해결을 위한 국제 제도도 마련되었다. 이러한 국제 환경 속에서 인류는 창의적 사고를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획기적 기술혁신을 이뤄내기도 했다.
많은 나라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혜택을 받았지만 한국만큼 혜택을 받은 나라는 많지 않다. 한국이 건국 후 80여년 동안 엄청난 번영을 이뤄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 국민의 근면성과 높은 교육열, 그리고 뛰어난 정치·경제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당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한국의 국가 정체성으로 뿌리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한미동맹 체결은 한국 안보의 초석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 경제의 근대화를 이끌었고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 정치 민주화에 기여했다. 이병철, 정주영, 최종현과 같은 기업가들은 세계적 경제강국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자유주의 국제질서 자체가 한국의 번영에 매우 우호적 환경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하에서 한국은 안보를 보장받을 수 있었고, 개방된 경제질서 속에서 통상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헨리 키신저 박사가 지적했듯이 한국은 폴란드와 같이 지정학적으로 매우 취약한 위치에 있는 나라다. 사방이 강국으로 둘러싸여 있어 강대국의 세력다툼 대상이 되었고, 외세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정착된 이후 한국은 주변 강국과 북한 독재정권으로부터 자주권을 지킬 수 있었고, 개방된 경제질서를 활용해 경제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한국의 핵심 국가이익은 강력한 안보를 기반으로 평화와 자주권을 수호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지속적인 자유와 번영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지키기 위해 지금 큰 도전에 직면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호하고 강화하는 데 한국이 더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 미국은 스스로 구축한 자유주의 질서를 흔들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종언을 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심각한 병을 앓고는 있지만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 처방을 통해서 회생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현실적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류가 시도했던 다양한 국제질서 중에서도 여전히 가장 나은 선택지가 자유주의 국제질서다.
중국이 제시하는 '인류운명공동체' 국제질서 비전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협력·상생·평화·조화 등의 이상적인 개념을 강조하지만, 구체적인 작동원칙이 없고 민주주의·인권·법치와 같은 보편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미국이 구축했지만 미국만을 위한 질서가 아니다. 자유주의 국가들은 한편으로는 미국을 독려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협력해 흔들리는 자유주의 질서를 바로 세워서 지켜야 한다.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지배했던 19세기 말의 '강대국 정치(great power politics)' 시대로의 회귀를 막아야 한다.
한국은 근 80년 동안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혜택을 받으며 놀라운 번영을 이뤘다. 이제는 그 질서를 고쳐서 지키고 강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할 때다. 이는 단순히 막연한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핵심 국가이익에 직결된 문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미래는 곧 한국의 미래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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